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저우 침공 (문단 편집) === 공격의 재개 === 국제사회에서 좋은 말로 달래고 있었음에도 일본은 중국이 즉시 철군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발악하기 시작했다. 12월 7일, 주미 일본대사 데부치 가쓰지(出淵勝次)는 스팀슨을 방문하여 중국이 약속을 어겼으니 시데하라 외상의 입장이 곤란하게 되었으며 진저우로 진격할 수 있다고 타진하였다. 이에 스팀슨은 만약 일본이 진저우를 공격한다면 미국은 만주사변의 목적이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자위적 조치가 아니라 장쉐량 군대를 궤멸시키는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 판단할 것이며 이는 [[켈로그-브리앙 조약]]과 9국조약을 위반하는 것임을 강력히 경고하였다. 또한 스팀슨은 시데하라가 입장이 난처해졌다지만 자국의 영토로부터 자국의 군대를 철수시켜야 하는 중국 정부의 고뇌는 시데하라의 고뇌보다 더 큰 것이라고 지적했다. 데부치 대사는 스팀슨에게 미국으로 하여금 중국에게 철병을 권고해달라고 청했으나 스팀슨은 곤란하다고만 대답하였다. 또한 스팀슨은 일본이 제시한 소릉하 경계선은 일본에게 지나치게 광활한 군사작전지역을 보장하는 것이라면서 이는 무리라고 대답했다. 난징의 넬슨 존슨 공사도 미영불 3국이 국제연맹 이사회의 의뢰로 중국군의 철수를 권고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며 중국의 여론이 격앙된 상태에서 영불미가 중국군의 철수만을 요구한다면 국민정부의 여론이 일본이 아니라 영불미를 겨냥하게 될 것임을 경고했다. 이쯤되면 미국 정부 뿐만 아니라 여론도 악화되어 11월 24일, 미국의 40여개 평화단체 대표자들이 후버 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하여 만주사변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확실하게 해줄 것을 청하였고 국제연맹에 출석한 주영 미국대사 도즈를 이사회에 출석시킬 것, 일본에 대한 경제제재를 실시할 것을 청하였다. 허나 국제여론이 뭐라고 떠들건 간에 자기네 기분 상한 것만 중요한 일본 군부는 입장을 바꾸어 관동군의 진저우 공격을 용인하였다. 12월 5일, 육군 중앙은 장쉐량에게 철군을 청하고 만약 듣지 않는다면 1개 사단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축출한다는 방침을 결정하고 작전 입안에 들어갔다. 12월 7일, 미나미 지로 육상은 외무상과 의논 후, 혼조 시게루 사령관에게 "요서지방은 비적이나 마적과 장쉐량의 사이가 매우 가깝기 때문에 일본군이 비적토벌을 실시할 시에는 장쉐량군과 충돌할 우려가 강하다. 종종 중국 측이 진저우, 산해관의 중립지역안을 제안하였기 때문에, 일본은 이것에 동의하고 이서 비적토벌을중지하였지만 중국 측의 성의는 일본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그간 요하 동서 일대의 마적활동이 날로 치열하게 되어 제국군은 군자체의 안전과 재만 제국국민의 안전 및 만주의 전반적 치안유지를 위하여 다대한 희생을 각오하고 어절 수 없이 일어나 이렇게 토벌을 실시하기에 이른 즉, 제국군의 이번 행동은 첫째로 지나측의 성의가 없음에 기초하여 어쩔 수 없었던 것으로, 소탕의 진전에 따라 만일 비적과 관련이 있는 지나군과의 충돌을 야기하고 혹은 일지 양국이 서로 접하게 될 때 통제되지 않은 지나군의 도발에 의하여 피아의 교전을 야기할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원래 제국이 좋아하지 않는 바이다. 하지만 진실로 어쩔 수 없는 것이다."고 지시했다. 참으로 뻔뻔하기 그지없는 정신승리였지만 이때 일본 군부의 마인드가 이러했다. 한편 학생들의 항일여론은 극에 달해서 일부 학생들은 국민정부 타도, 삼민주의 타도를 선언하면서 [[중국 공산당]]을 추종하기도 하였고 이에 12월 5일, 국민정부는 학생들이 난징에 와서 청원하는 것을 금지하고 12월 8일 학생들을 상대로 다음과 같은 통고를 냈다. ||청년 학생 중에는 적의 중상적인 역선전에 넘어가서 본분을 잊고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 이 국난의 시기를 맞아, 질서를 파괴하고 교통을 방해하는 청년은 참다운 구국 청년이 아니다. (...) 국가의 법령에 위배되고, 매국반동자와 함께 동맹휴학을 하는 하려는 것은 나라의 죄인이다. (...) 애국 청년들이여, 규율을 엄수하고 동시에 외모(外侮)를 막아서, 구국의 목적을 달성하자!|| 하지만 학생 시위는 조금도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12월 11일 오후, 난징에서 [[베이징사범대학]], 중국대학 등 전국각지에서 몰려온 대학생들이 국민정부 타도를 외치면서 데모를 하다가 2명이 체포되었다. 이에 시위는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 요구로도 번졌고 상하이 시장 [[장췬]]에게 공안국장을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다. 12월 15일, 무려 7만명의 학생들이 몰려와 국민당 중앙당부와 외교부를 둘러싸고 시위를 벌였고 베이핑에서 온 학생 200명이 권총과 몽둥이로 무장하고 외교부로 난입해서 닥치는대로 기물을 때려부수고 저지하는 직원들을 구타했다. 이에 국민당 감찰위원 [[차이위안페이]]와 행정원 부원장 [[천밍수]]가 학생들을 설득하기 위해 직접 나섰으나 학생들은 차이위안페이와 천밍수를 모두 구타하여 부상을 입혔다. 학생들이 두 사람을 조리돌리기 위해 건물 밖으로 끌고 나가려 하자 군경이 출동하여 폭행범들을 체포함으로 상황은 진정되었다. 사태가 극도로 악화됨에 따라 12월 15일, [[장제스]]가 국민정부 주석 겸 [[행정원장]]에서 사퇴하였고 [[영월합작]]이 이루어졌다. 이후로도 반일 학생시위는 진정되지 않아 12월 17일, 다시 1천명의 학생들이 곤봉과 철봉을 들고 중앙당부를 포위하고 공산당을 선전하는 전단을 뿌리면서 중앙당부에 난입을 시도했다. 또한 국민당 기관지 중앙일보의 인쇄공장을 습격하여 불을 질렀다. 12월 18일, 국민정부는 <월궤행동 단속령>을 내림으로 학생들의 과격행동에 대한 강경대응에 나섰고 이로서 항일시위는 진정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